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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벌새 관련 사진
    영화 벌새 관련 사진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벌새는 어린 소녀인 은희라는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는 성장 서사로, 독특한 서사 리듬과 공간의 상징성, 비주류 시선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통해 기존 영화 문법을 해체하고 독립영화만의 서정성과 깊이를 전하는 작품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영화 벌새 속에 담긴 이러한 키워드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영화 벌새에 내포된 서사 리듬: 감정 중심으로 흘러가는 시간

    이 영화는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중학생 은희가 겪는 정서적 파동과 성장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겉으로 보기에 단조롭고 특별한 사건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다층적인 감정의 흐름이 밀도 있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은희는 가족 안에서 외면받고, 학교에서는 무기력하며,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애매모호한 거리를 경험합니다. 언뜻 보면 변화가 거의 없어 보이는 일상의 흐름이지만, 관객은 은희의 시선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큰 감정적 격변인지 체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 전달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서사 리듬입니다. 일반 상업영화는 명확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승전결을 구축하지만, ‘벌새’는 느리고 반복적인 장면들 속에서 정서를 다층적으로 축적시킵니다. 은희가 학교에 가고, 친구와 어울리며, 남자친구와 데이트하고, 병원에 가는 일상들은 독립된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흐름을 관통하는 정서는 극도로 섬세하고 지속적으로 변화합니다. 특히 오빠에게 맞은 뒤에도 별다른 갈등 구조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방식은, 서사 리듬이 감정의 단절과 정서적 불균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능을 합니다. 은희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침묵과 시선, 주변 인물과의 거리로 은연중 표현됩니다.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은 유일하게 은희의 감정을 포착하고 진심으로 반응해 주는 인물로, 이후 서사의 리듬도 영지와의 대화 속에서 미묘하게 변화합니다. 영지의 죽음은 이 영화의 전환점이지만, 그것마저도 절제된 리듬으로 처리되어 오히려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렇게 영화 벌새의 서사 리듬은 사건 중심이 아닌 감정 중심이며, 감정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축적되고 변화하는지를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공간의 상징성: 침묵하는 장소들이 전하는 은희의 내면

    영화 벌새는 극 중 인물의 내면을 설명할 때 대사보다 공간의 상징성을 더 많이 활용합니다. 이는 은희라는 인물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줄거리 속 주요 장면들은 모두 상징적인 공간 배치로 감정을 구현합니다. 은희가 가장 많이 머무는 공간은 집인데, 이 집은 전형적인 한국 중산층 아파트로, 좁고 단절된 구조 안에 감정의 억압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어머니는 피곤에 찌든 현실형 인물이며, 오빠는 폭력을 행사하고, 언니는 자신의 고민으로 바쁩니다. 이런 가족 구성원 간의 거리와 침묵은 집이라는 공간에 그대로 반영되어, 카메라는 좁은 거실, 벽지, 주방, 침실 등을 통해 은희가 느끼는 소외감을 시각화합니다. 한편, 병원은 그녀가 혹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등장하며, 단순한 치료 공간을 넘어서 신체적 변화와 성장의 공포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사용됩니다. 그곳에서의 침묵과 무채색 배경은 은희가 느끼는 불안과 외로움을 더욱 강조합니다. 가장 특별한 공간은 바로 한문 학원입니다. 은희가 이 학원에서 영지 선생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 공간은 은희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감정 표현이 가능해지는 장소입니다. 한문이라는 고전적인 언어, 나무 냄새가 나는 책상, 벽면에 걸린 붓글씨 등은 모두 상징적 소품으로 사용되며 은희의 내면 변화를 암시합니다. 영지 선생님의 방 또한 중요한 공간으로, 그 방에서 은희는 감정적 해방감을 느끼고 소통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체험합니다. 이러한 공간의 상징성은 영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특별한 줄거리의 전개 없이도 인물의 감정 상태를 이해하게 만드는 정서적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즉, 이 영화에서의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주체적 내레이션 역할을 하며, 관객은 은희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를 공간을 통해 직관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비주류 시선: 은희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의 균열

    영화 벌새는 은희라는 중학생 소녀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 시선은 단순한 10대 청소년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균열과 모순을 감지하고 있는 비주류 시선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은희가 일상을 살아가며 관계의 단절, 가족 내 폭력, 성적 정체성, 계층 간 불평등,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을 서서히 체험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어떤 특정 사건보다도 은희의 ‘느낌’과 ‘관찰’로 전달되며, 바로 그 방식이 비주류 시선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예를 들어, 은희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친구에게 실망하지만, 그것이 대사로 드러나지 않고 행동과 거리감으로만 표현됩니다. 부모의 싸움, 오빠의 폭력, 연인의 외면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주류 영화들이 감정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영화는 그런 감정조차도 쉽게 포착되지 않는 상태로 관객 앞에 놓습니다. 카메라 또한 비주류 시선을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은희는 프레임의 중심에 있지 않고, 옆모습이나 뒷모습, 혹은 거울이나 창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은희가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동시에, 관객이 은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은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위치에 서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특히 한문 학원 장면에서 영지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은희는 비로소 말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며,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은희에게 다시 무력감을 안기고, 세상이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진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은희는 끝내 무너지지 않고, 비주류 시선을 잃지 않은 채 세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 벌새가 관객에게 남기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벌새는 서사 리듬, 공간의 상징성, 비주류 시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단순한 성장 영화가 아닌, 독립영화가 가질 수 있는 정서적 깊이와 영화적 실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감정을 표면화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끌어올리는 방식, 공간을 감정의 은유로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기존 사회 구조에서 소외된 시선을 중심으로 삼는 접근은 이 영화를 단지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 새로운 영화 언어의 가능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듭니다. 벌새는 날갯짓이 작지만, 그 진동은 오랜 시간 울려 퍼지듯, 관객의 내면에 깊은 인상을 줍니다.